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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욱 - 그리움의 단풍
• 김윤지 - 가을 편지
• 하수정 - 진심, 못다한 이야기
• 이기명 - 봄 되면 찾아오는 따뜻한 술고래의 순정

• 이지현 - 뽀로로와 나의 친구들

그리움의 단풍

 정용욱

마음에 그리움의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고

불타는 듯한 홍엽이 가슴을 적시고 사랑에

물들었다.

가슴을 가득 채운 그리움의 단풍이 온몸을 물들

이고 누군가에게도 물들이고 싶은 욕심을 부려

봤던 마음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듯 그리움이

사그락 떨어진다.

시간이 가고 어느 땐가부터 바람에 한잎 두잎

단풍잎이 떨어져 나갈 때마다 그리움의 무게도

조금씩 가벼워진다.

신록이 청춘처럼 푸를 때는 영원할 듯하고

단풍이 중년처럼 아름다울 때는 그 찬란함이

지속될 거라 생각했었는데 시간과 계절 앞에

푸르름과 아름다움을 내려놓을 줄 아는 자연의

순리를 눈여겨본다.

가슴을 가득 채운 그리움의 단풍을 한 아름 안은

오늘. 가을을 한 아름 안은 누군가에게로 달려가고 싶다.

가을 편지

 김윤지

늦은저녁, 미지근한 물에 떠다니는

컵라면 과자를 씹어먹어도 까르르 웃음짓던 악기친구들,

순수하고 파릇한 마음 간직했더랬지

메타쉐콰이어 길가에 퍼지던 음율은

바람타고 어딜 날아갔을까

그 시절 관악부의 우리들은 악기의 선율에 마음의 춤을,

감동의 잔물결로 물들었었네

우리의 아름다운 날개짓은 10월을 비상했네

춘천대회 깃발을 위해 요동친 우리 가슴속 열망

그 날의 온도와 함성, 선생님의 눈빛만으로 충분했네

은빛 목걸이 가슴에 안고 돌아서던 기억,

다독이며 견뎌온 악기 열정이 사르르 녹아내렸네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모래시계처럼 거꾸로 흐를 수 있을까,

그 날, 그 순간 그때의 시간속으로

마음 보석함에 꼭꼭 숨겨져버린 그 시절의 가을편지,

향기로 띄워보낸다

진심, 못다한 이야기

하수정

그려내지 못한 말들은

조용히 총총히

여백 속에 담는다.

그리기만 했던 약속들은

조용히 단단히

고이 접어 보낸다.

이따금씩 떠오르는

꿈같던 날들

조용히 쓸쓸히

숨어 너를 그린다.

시간은 미쁘게 흘러가고

아스라진 마음만

고스란히 간직한 채

조용히 천천히

가슴 속에 묻는다.

그래도 역시

아직 네가 그립다.

수줍게 전했던 진심도

두 손이 처음 포개지던 순간도

마주보며 웃던 일상도

우는 나를 달래주던 따스한 품도

느린 내 발걸음 따라

나란히 발맞춰 걷던 다정함까지

지울 수 없고 놓을 수 없다.

미처 보내지 못한 마음을

조용히 총총히

너를 그리며 적는다.

보고싶다.

봄 되면 찾아오는 따뜻한 술고래(아버지)의 순정

이기명

♬ 가슴에 이 가슴에 심어준 그 사랑이 이다지도 깊을 줄은 난 정말 몰랐었네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진정 난 몰랐었네♬

  골목길 저 멀리서 최병걸의 ”진정 난 몰랐었네“가 울려 퍼지면, 아버지가 곧 도착한다는 신호다. 나는 이때부터 귀를 크게 열어, 혀 꼬부라진 노랫말 인지 또렷하게 들리는지부터 살폈다. 전자의 경우라면 서둘러 잠든 척했고, 후자라면 얼른 아버지 마중을 나갔다. 기분 좋게 취한 아버지의 두 손에는 호떡 봉지가 들려있을 때가 많았다.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적당한 음주와 내가 드리는 아부성 발언이 곁들여지면 가끔 뜻밖의 재물이 나오기도 했다. 주머니 속 꼬깃꼬깃한 지폐를 몽땅 던져주는 아버지를 잠시 천사처럼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 모두가 인정하는 ‘술고래’ 였다. 술집 주인, 직장동료, 심지어 파출소까지 술고래를 모셔가라는 전화가 선거철 여론조사처럼 잇따랐다. 아버지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 엄마와 나는 늘 조마조마했다.

집에서는 독재자, 호랑이 같은 아버지는 집 밖에선 키다리 아저씨쯤 된다. 월급의 절반 이상을 술집에 기부하고 귀갓길 노점상에 남아있는 호떡, 튀김, 국화빵을 모조리 책임진다. 한 번은 양다리가 없는 장애인이 검정 고무로 하반신을 감싸고 수레 끌어 장사하는 모습을 본 키다리 아저씨는 이태리타월, 화장실용 나프탈렌, 고무장갑 등이 실려있는 손수레를 통째도 끌고 온 적이 있다. “묵고 살 그 따고 고마 다 주이소! “했다는 시장 사람들의 증언에 엄마는 가슴이 무너졌다. 이날은 엄마가 애타게 기다렸던 월급날이었고, 두툼해야 할 월급봉투는 이미 홀쭉해져 있었다.

'지금 남의 집 처자식 먹고사는 걱정을 해야 한단 말인가?' 주인집에 내야 할 공과금이며, 보일러 기름값, 부식비 등을 수북한 나프탈렌으로 받아 든 엄마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육두문자를 동원해 아버지에게 퍼부었다. 두 분은 자주 다퉜는데, 승률은 아버지가 월등했다. 엄마는 서류에 도장을 찍자고만 했지, 정작 법원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이혼 절차도 모르는 딱 그 시대 아내였다. 이혼은커녕 술고래에게 먹일 북엇국, 콩나물국 등 속풀이 해장국을 끓여 내는 엄마를 나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나는 얼굴과 가슴에서 올라오는 여드름이 몹시 괴로운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하는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아버지와는 대화 없이 가깝고도 먼 사이를 간신히 이어갔다. 일상 속 대부분의 소통은 엄마와 주고받으면서 되도록 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다.

사춘기 강세가 끝나갈 무렵 유난히 추웠던 겨울, 새끼발가락에 동상이 생겼다. 병원에 다녀와 자고 있는데 발가락에 인기척을 느꼈다. 실눈을 뜨고 봤더니 아버지였다. 잘 씻지도 않은 내 발에 입을 맞추고 빨리 아물라며, 주문을 외우고 있는 아버지는 울먹인 목소리였다. 그가 맨정신에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난생처음 본 나는 덩달아 울컥했으나, 들키지 않으려 자는 척 참았다. 이날 이후 서먹했던 부자 관계가 얼었던 한강이 녹듯 서서히 풀려갔다.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을 받던 날 동네 중국집에서 탕수육을 시켜놓고 주(酒) 당계의 살아있는 전설! 술고래가 알려주는 주법을 배웠다. 이후 결혼 전까지 간간이 아버지와 술잔을 부딪치며, 관계를 가까이 맺었다.

(다음 호에 계속)

뽀로로와 나의 친구들

이지현

  며칠 전 TV에서 뽀로로 시리즈 20주년 특집 프로그램인 「다큐 뽀로로는 스무 살」이 방영되었다. 지금 중학생, 초등학생인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보여주며 뽀로로와 친구들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지라 "어머~ 뽀로로와 친구들이 스무 살이 되었다고?" 이야기 나누며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아이들도 유아 시절 즐겨 보았던 기억이 나는지 기대에 찬 눈빛을 반짝이며 오랜만에 뽀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을 행복한 시간으로 채워주었던 추억 속 만화 주인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나는 어릴 적 그 누구 못지않게 만화를 참 좋아했었다. 지금 TV에서 방영되는 만화를 말하자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컴퓨터 그래픽 효과가 느껴지는 다소 좀 차가운 느낌과 가요 뺨치는 수준의 세련된 주제가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즐겨 보았던 그 시절의 만화영화는 그야말로 인간미 풍기는 손 그림의 결정체로 따뜻한 느낌을 주었고, 주제가는 누구나 신나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가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기공룡 둘리, 달려라 하니, 영심이, 모래요정 바람돌이, 꼬마 자동차 붕붕, 날아라 슈퍼보드, 개구쟁이 스머프, 개구리 왕눈이, 마루치 아라치, 미래소년 코난, 빨강머리 앤, 요술공주 밍키 등등 그 전부를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컴퓨터도 핸드폰도 없던 그 당시에는 TV에서 보여주는 만화가 전부였기에 만화가 시작되는 저녁이 될 즈음이면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도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휴일엔 또 어땠는가? 아침 7시에 시작하는 만화를 보기 위해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TV 앞에 앉아 만화가 시작되길 기다렸었다. 만화영화는 어린 나에게 있어 인생의 즐거움이자 행복이었고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다음 호에 계속)